인생 역할

사람한테는 어울리는 역할이 있는 것 같아. 그 역할을 맡아야 일이 잘 풀린달까? 그거 아세요, 강아지는 귀여우니까 막 사람 품에 안겨도 "어구 귀여워~" 하면서 받아주잖아요? 근데 망아지가 그러면 어떡할까요? 50kg짜리가 갑자기 와서 털썩 안기면, 그건 진짜 매를 버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 제 역할을 찾아야 일이 풀린다는 결론이에요.

저도 깨달았어요. 내 역할은 리액션이구나. 주인공이 되려면 뭔가 대단한 걸 해야 하잖아요? 예를 들면 잘생기거나 돈이 많거나, 최소한 어떤 자리에서든 말발로 분위기를 장악할 줄 알아야 되는데... 저한테는 그게 없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그냥 옆에서 "와~ 진짜?" "대박이네!" 이런 거 하는 거죠. 사람들은 의외로 이런 리액션을 좋아해요. 특히 회식자리에서 상사가 썰 풀 때 "우와, 진짜 사장님? 그때도 역시 대단하셨네요!" 이러면 그 사람 인생 최고 히트곡을 듣는 것처럼 신나합니다.

근데 웃긴 건 뭔지 아세요? 그런 리액션하다 보면 저도 제가 뭘 아는 것 같아요. "맞아요 맞아요,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거예요!" 이러는데, 내가 맞는지 틀리는지도 모르면서도 열심히 맞장구를 치고 있어요. 사실 이렇게 말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조금 신뢰감 있는 사람으로 보여요. 여러분도 그렇지 않나요? 회사 생활할 때 뭔가 아는 척 잘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리액션 잘하는 사람은 꼭 승진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내 운명은 리액션 담당이다.

근데 이게 쉽냐? 아니, 이게 진짜 어려워요. 리액션도 다 눈치 싸움이거든요. 상황 보고 적절한 타이밍에 "진짜요?" 해야지, 괜히 엇박자로 "진짜요?" 했다가 정색하는 분위기에서 튀어나가면 망하는 거죠.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소리없이 조용히 앉아서 물만 마셔야 돼요. 내가 무슨 망아지도 아니고, 그 순간 주인공 노릇하려고 덤볐다가 인생 쪽박 차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저도 마음을 비웠어요. "이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다."

결론은요? 각자 자기 역할에 맞게 사는 게 평화롭다는 거죠. 강아지는 강아지답게, 망아지는 망아지답게 살아야 하고, 저는 리액션 담당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오늘 여기 모인 여러분도 제 역할을 도와줘야 돼요. 제가 지금 말하는 거 듣고 그냥 이러지 마시고 "와~ 진짜?" 이런 거 한번씩 해줘야 돼요. 아니면 저도 이 자리에서 망아지처럼 멘트 털다가 매 맞을 수 있어요. 여러분이 협조 안 해주면 저는 아무 것도 아니니까.

자, 그래서 제가 오늘 깨달은 거. "인생은 결국 리액션이다." 이걸로 강연 한번 해도 될 것 같아요. 회사에서 칭찬을 못 받는다고요? 쓸데없이 주인공 욕심 부리지 말고 옆에서 "대박이에요!" 하고 계세요. 그러면 승진은 따놓은 당상입니다. 근데 또 과하면 어쩌냐고요? 그러면? 음... 뭐, 그때는 그냥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다가 매 한번 맞으면 되죠.